뉴욕의 The loft와 다르다.
아래 글을 읽다 한글로 정리 한다.
https://daily.redbullmusicacademy.com/2015/04/nightclubbing-the-loft/
초기 하우스 음악의 시절에는 시카고, 뉴욕, 디트로이트의 멋진 나이트클럽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있었지만, 별로 알려지지 않은 곳 중 하나가 있는데, 바로 보스턴의 "THE LOFT"이다. 이곳은 Sounth End의 주목할만한 한 골목에 위치한 멤버십 전용 클럽으로, 여기에서 Armand Van Helden을 포함한 여러 DJ 세대가 전문적인 기술을 익혔다.
글쓴이 : John Barera
The Loft는 1980년대 중반에 개장하여 1995년 폐쇄될 때까지, Music Box, Paradise Garage, Warehouse와 유사한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클럽은 하우스라 불리는 언더그라운드 댄스 음악의 새로운 양식을 중심으로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모았다. 게이들, 레이버들, 하우스 매니아, 아프리카계 미국인, 라틴계, 아시아계, 갱스터, 정장차림의 사람들, 스케이터, 브레이크댄서들이 모여들었는데 이는 미국에서 가장 심각하게 인종이 분리된 도시 중 하나인 보스턴에서 특히 놀라운 성취였다.
여러 인터뷰를 통해 The Loft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클럽의 이야기를 전한다. 여기에는 클럽의 레지던트 DJ 중 세명인 Armand Van Helden, DJ Bruno, Francis Englehardt가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모두 The Loft이후 음악 분야에서 긴 경력을 쌓았으며, Armand Van Helden은 클래식 프로덕션과 세계 투어를 통해 전설적인 지위를 얻었으며, DJ Bruno는 보스턴의 소울풀한 딥 하우스 씬을 25년 이상 지켜왔으며, Englehardt는 영향력 있는 레코드 스토어 Dope Jams를 공동 설립했다. 또한 댄스ㅓ, 음악가, 시인인 Liza Zayas, 보스턴 하우스 음악 베테랑 Bob Diesel, 그리고 보스턴 딥 하우스 듀오 The Shadow Kings의 Nick Balodimas로부터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Armand Van Helden : 나는 캠브리지의 클럽M에서 하우스 음악을 처음 접했다. 보스턴에서 첫 번째 하우스 클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로 흑인들로 이루어진 대학생들이 많이 찾았는데, MIT 캠퍼스 근처에 위치해 있었고 DJ의 이름은 Jide Max였다.
Bob Diesel : Jide Max는 보스턴의 하우스 음악의 대부였다. 그는 관객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를 알았다. 그냥 음악을 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는 관객을 참여자로 만들었다. 그들에게 대가가 아니라 함께 파티하는 것이었다.
Armand Van Helden : 나는 하우스 음악을 처음 접했을때, 그 음악에 푹 빠져들었다. 당시 18세로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진정한 종류의 영적이고 감성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Club M에서는 Lil Louis의 French Kiss를 틀었고, 가운데 부분에서 노래가 느리게 진행되면서 사람들이 모두 바닥으로 떨어지고, 모두가 벌래와 뱀처럼 춤을 추는 것이었다. - 완전히 미친 일이었다. 그때가 정말 놀라운 시기였고, 관객들은 꽤 지적이었으며, 클럽에서 약물이나 술이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옷을 갈아입을 수 있도록 배낭을 가져갔는데, 너무 많이 땀을 흘려서 그랬다. 그곳은 마치 땀이 가득 찬 상자처럼 뜨거웠다.
Bob Diesel : 나는 전 여자친구를 통해 The Loft 에 대해 들었다. 나는 1987년에 처음으로 보스턴으로 이사온 해에 거기에 다녀왔다. 그녀가 소개해준 몇개의 클럽에 가본 적이 있다. 그 당시에는 별로 하우스 음악이라고 불리지 않았다. 뉴욕에서는 클럽, 비밥(재즈에서 개념을 가져온 용어), 언더그라운드, 뉴스타일 등으로 불렸으며 나중에 하우스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보스턴에 왔을 때에는 언더그라운드라고 불렸다.
Armand Van Helden : The Loft는 원래 1980년대 중반, 대략 1984년이나 1985년경에 개장되었다. 당시 클럽 소유자라면 정치적인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어야 했고, 행동할수 있는 경찰을 고용해야 했으며, 시스템과 협력해야 했다. 그러나 그 소유자는 그런 접근을 하지 않았고, 어느날 Lisa Lisa & the Cult Jam의 공연이 준비되었는데, 경찰이 영장없이 들이닥쳐와 클럽을 압수수색하고, 사람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경찰은 대대적인 밤을 기다렸다가 클럽을 폐쇄시켰다. 나중에 내 친구가 그들이 The Loft를 다시 여는 것을 알려주었고, 하우스 나이트를 가지고 있었다. 그 당시 그는 프로모터 중 한명이었고, 나에게 다가와서 "여가에서 한번 해볼 수 있을까?" 라고 물어봤다. 나는 소유자와 미팅을 가졌고, 그가 클럽이 6시까지 오픈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을 때, 나는 그를 보고 "정말이지?"라고 말했다. 나는 보스턴에서 2시에 문닫는것에 지쳐있었고, 그것에 확실히 기뻤다.
DJ Bruno : 내가 Loft에서 처음 플레이한건, 소유자인 Joe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서 Jide라는 남자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을 때였다. Jide는 뉴욕으로 이사가기로 했는데, 그에게 클럽에서 레지던시를 제안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그는 나에게 시도해 보라고 말했기 때문에 나는 거기에 가서 플레이했고, 소유주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나는 너의 플레이스타일이 마음에 들어, 너는 댄스 플로어에 주의를 기울이고, 댄스플로어를 관찰하고 연구하는게 좋아". 나는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내게 있어서는 그게 당연한 일인 줄 알았다. 아무튼, 아마 그가 내 연주 스타일에 정말 만족했던 것 같은데, 그 후로 몇달 동안 소식을 듣지 못했다.
Armand Van Helden : 1,2주동안 나는 몇장의 플라이어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MS Paint와 같은 정말 나쁜 프로그램으로 스스로 모든 플라이어를 만들었는데, 그런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12시부터 6시까지 영업을 했고, 나는 DJ이자 홍보를 해야 했으며, 출입구를 지켜봐야 했다. 첫 주에는 그들이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모았다. 그들은 75-100명정도를 모았고, 내가 왔을 때는 약 200명을 모았다. 다음 주에는 400명이 모였고, 나는 다른 DJ를 데려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3,4번째 주에 DJ Bruno를 데려왔다.
DJ Bruno : 내가 알게 된 다음에는 나는 다시 The Loft에 있었고, 우리 둘다 그곳의 레지던트가 되었다.
Armand Van Helden : 나는 프로모터로서 스스로를 좀 해방시킬 수 있었고, 클럽을 볼 수 있었다. 나는 1시 30분쯤 나가서 플라이어를 나눠주곤 했고,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DJ 브루노와 나는 각자 1시간씩 세트를 틀면서 새벽 6시까지 진행했다. 한 달이 지나면서 거의 거리까지 줄 서 있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Francis Englehardt : 나는 그 클럽의 거대한 부분이 주로 게이 클럽이라는 사실이었고, 그것이 주된 원동력이었다고 생각한다. 게이 커뮤니티에 성장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 그들은 일반적인 관객들로부터도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Nick Balodimas : 클럽에 가려면 괜찮아 보여야 했지만, 더 로프트에 가면 사람들이 백팩을 메고 나올 때도 있었다. 그들은 직장에서 바로 와서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바로 브레이크댄싱을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열심히 땀을 흘렸고, 자리를 찾아서 거기에 머물렀다.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작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했다.
Francis Englehardt : 나는 그 당시에는 18세 이상 입장이 허용되는 클럽이었기 대문에 부모님이 몰래 데려가 주었고, 나는 거기에 처음 가기 시작했을 때 14세 정도 였다. 내 엄마는 외출해서 춤추는 것을 정말 좋아했고, 내 계모는 당시 음악과 하우스 씬에 정말 관심이 많았다. 그들은 나를 The Loft와 DJ Bruno에 소개해 주었다. The Loft에는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는 전형적인 클리셰, 그것은 모두 사실이다. 아래층, 하우스 플로어는 1992년에 처음 가기 시작했을 때 90% 가 흑인과 히스패닉이었다. 금요일 밤에는 하우스플로어에 대개 DJ부스 앞에 퀸들이 춤추는 런웨이가 있었고, 댄스 플로어에는 완전히 혼합된 커플들이 있었다. Ipswich 교외까지 와서 그런 모습을 보는 것은 정말 놀라운 경험이었다.
Armand Van Helden : 딥 언더그라운드 하우스 클럽은 존재했고, 보스턴이나 뉴욕에도 있었지만, 아무도 레이버들은 다른 섹션으로 불러들이고 있지 않았다. 나는 레이브와 딥하우스를 좋아했기 때문에 "왜 이 둘을 결합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레이브 분위기는 정말로 레이브 분위기 그 자체였다. 진짜로 말하고 있다. 나는 레이브가 크기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만약 레이브를 압축할 수 있다면, 그 방이었다. 그곳은 정확했고, 현실적이었다. Tom Mello가 그 사람이었고, 그는 그 방에 맞는 DJ를 불러들였고, 내가 그글 데려와서 그 일을 시작했을 때, 우리는 파티의 이름을 "Rise, at the Loft"로 변경했다. Tom은 나를 자신의 플라이어 디자이너 중 한명에게 소개해 주였고, 그들은 그 이후로 그래픽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로고를 고안하고 플라이를 신선하게 만들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The Loft로 알지 않았다. 그들은 Rise로 알고 있는데, 특히 레이버들이 있는 층에서 그랬다.
Nick Balodimas : Dance Music Plus에 레코드를 사러갈때 Bruno가 나를 더 자주 보게 되었다. Bruno는 나에게 "나는 The Loft에서 이 나이트를 하고 있어"라고 말했고, 언젠가는 나에게 한타임을 줬다. 그낭 나타나서 입장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멤버십 전용 클럽이었는데, 정회원이 되고 싶으면 약간의 절차를 거쳐야 했다. 나는 운이 좋았다. 나중에는 멤버십을 얻기가 더 어려워졌다. 항상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Armand Van Helden : 멤버십 카드는 한명의 손님만 허용되었고, 멤버십이 있는 사람들은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 "내가 널 데리고 들여보내줄 테니까, 다음에 오려면 Armand를 찾아가봐. 매주 이렇게 할 수는 없으니깐"이라고 말했다. 내가 DJ 부스에서 나오면 그들은 기다리고 있는데, "야 야, 멤버십 어떻게 돼지? 라고 물어봐서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좀 악몽 같았고 더 덧붙이자면 거대한 남자들이 다가와서 내게 "나 몰라"라고 물어봤을 때, "친구랑 다음 주에 들어와봐. 그리고 만약 너가 좀더 하우스 헤드 같이 옷을 입고, 평화적인 분위기에 맞는 모습이면 고려해볼게, 몇번더 여기에서 좋은 행동을 보이면 나는 너에게 다가가서 멤버십 카드를 줄게"라고 말해야 했다. 미쳤다. 정말로 효과가 있었다! 나는 내 권력을 과시하려는 것이 아니었고, 그냥 모두가 평화롭기를 원했다. 그리고 이게 효과가 있었다! 사람들은 들어와서 변화하기 시작했고, 멤버십 카드를 주면서 거의 보상받듯이 정말로 행복해 했다. "고마워, 진짜로 너가 그렇게 말해줘서 나 너를 존경했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는 거의 중재처럼 되었는데, 그들은 말 그대로 사람으로서 변화하고 음악을 알게 되었으며, 그 곳에 행복을 가져왔다.
Nick Balodimas : 바운서들은 당신이 뭔가를 할 것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이전에 당신을 본적이 없었다고 생각해서 당신을 의아하게 쳐다보곤 했다. 그런 다음에는 이 낡고 구불구불한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그곳은 좁아서 사람들이 동시에 올라가거나 내려갈 수 없었고, 그곳이 유일한 입구와 출구였다. 나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난 적은 없었지만, 문 앞에서 거부당하는 사람들을 본적이 있었다. 아마도 그들은 관객에게 신뢰를 줘야 했고, 이상한 사람들이 나타나서 장소를 망치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민감한 문제였다. 그곳은 진정한 게이 클럽이었고, Armand가 나타나면서 전체 분위기가 변했어 - 흑인, 백인, 아시아인, 스케이터, 펑크, 게이, 스트레이트 모두가 함께 있었다.
DJ Bruno : 정말로 좋은 시간이었고, 좋은 시대였다. 우리는 모두 젊었고 그런 종류의 음악이 우리에게 새로웠다. 그곳에 있는 에너지와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 모두가 정말로 즐기고 있었다.
Nick Balodimas : 처음으로 그곳에 들어갔을때, 거기는 정말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고, 누군가에게 부딪힌 순간 나는 즉시 충돌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했다. 그사람은 "괜찮아, 친구?" 라고 말했고, 나를 놀라게 했다. 다음에 나는 DJ 부스 바로 앞에 서 있었고, 여기저기에서 퀸들이 캣워크를 하고 있었다. 나는 브루노가 Frankie Knukles의 노래를 틀고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러자 사람들이 울기 시작했다. 어디서 본 적이 있을까? 사람들이 손을 들고 울고 있는데 나도 정신을 잃고 울었다. 나는 17 또는 18살쯤이었는데 내 삶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모르겠고, 여기는 사람들이 자신을 최대한 표현하고 있는 곳이었다. 보통의 클럽에 들어가면 사람들이 당신을 주시하고 무엇을 하는지 살펴보는데, 그곳은 그렇지 않았다.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며 벽은 땀을 흘렸다. 사람들은 그곳을 살아 숨쉬는 존재처럼 묘사했고, 사실 그랬다. 거기는 정말 뜨거워져서 작은 공간이었기 때문에 무척이나 더워졌다. 벽은 벽돌이 노출되어 있었고, 바닥은 목재였다. 가끔씩 그 바닥이 무너질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Armand Van Helden : 나는 이전에 보스턴에서 파티를 열었고, 이 관객을 알고 있었고, 그들이 듣고 싶어하는 음악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The Loft에서 2달이 지나자, 그곳 주변에는 온동네를 도는 줄이 있었다. 2시가 아니라 12시 30분에, 셋을 플레이하면서 부스안에서는 사람들과 아주 가까이 있었다. 그들의 몇 피트 위에 떠 있었다. 그들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The Loft는 소음이 큰 곳이었다. 음악이 마음에 들면 모두가 소리치고 반응했다. 사람들은 항상 노래를 부르고, 방에서 나오는 에너지가 당신의 얼굴에 날아갔다. 플레이하면서 소름이 돋았다. 레코드를 내리면 사람들이 당신에게 다시 소리치곤 했다 - 술을 들고 있었다면 거의 떨어질 뻔했다. 이것은 매우 상호작용적인 일이었다. 이것은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피곤해질 것 같았는데, 정말이지, 그들은 몇시간 동안 계속 갔다.
Liza Zayas : 내 프롬 데이트가 나를 처음으로 The Loft로 데려왔다. 나는 매주 기차를 타고 갔고, 문이열리자마자 도착했는데, 나는 천국을 발견한 것 같았다. 나는 그저 다음 주가 끝나고 금요일이 도착해서 토요일 새벽에 그곳에 있길 원했다. 떠나면서 얼굴에 햇빛을 느끼고, 땀에 젖고 더러워지면서 환희에 넘치는 느낌을 받았다.
Armand Van Helden : 사람들이 들어오고, 레이버들, 주로 백인 교외 어린애들, 1층과 흑인, 스페인계 사람들을 무서워했다. 그들은 곧바로 레이브 층으로 가버렸다. 그러나 그곳의 흥미로운 점은 여자 화장실이 레이브 층 뒷부분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레이브 층 입구 바로 앞에 자리를 잡아 도시 여자들이 올라오는 것을 지켜보곤 했다. 그리고 레이버들은 그들의 플랫폼, 모피, 비즈로 무장한 채로 팔을 뻗고 글로우 스틱을 흔들면서 굳어 있었다. 정말로 웃겼다. 그들은 통과 했지만 교류를 강요받았다. 그것이 The Loft의 핵심 요소이고 - 어떤 의미에서는 - 그것은 우연 중의 하나였다. 나는 The Loft를 떠날 때, 마지막 몇달 동안 레이브 층을 확인하러 새벽 4:30쯤 올라갔을 때, 아래층에서 많은 아이들이 레이브를 즐기는 것을 기억한다. 셋이 진행됨에 다라 모든 레이버들이 아래층으로 내려와서 플로어가 섞이기 시작하고, 새벽 4:30이나 5시 쯤에는 플로어가 혼재되어 정말 멋진 광경이었다. 정말 아름다운 일이었다.
DJ Bruno : 몇 년이 지난 후, Armand는 뉴욕으로 이사갔다. 그곳에는 가끔 몇몇 게스트가 들어오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나는 혼자서 플레잉 했다. Deep Dish의 Sharam, King Britt같은 게스트도 있었고, 여러 몇몇 이름들이 있었지만 크게는 없었다. 그러나 The Loft에 자주 찾아오던 Francis Englehardt는 다르게,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이 있어서 나는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Francis Englehardt : 나는 혼자 DJ를 공부했는데, Ipswich에서 자라나서 주변에서 나에게 어떻게 하는지 가르쳐 줄 사람이 전혀 없었다. Bruno는 나를 일요일 밤에 하던 라디오 쇼에서 플레이하게 했었고, 항상 새로운 사람들 위한 문을 열어주는 정말 멋진 사람이었다. 그는 항상 그런일을 해 왔다. 나는 정말 당황스러웠다. 그때 10대였고 갑자기 DJ Bruno와 함게 라디오 쇼를 하는 거였다. 처음 세개의 믹스를 정말로 망쳤다. 나는 레코드를 위한 레코드로 계획을 세웠고, 집에서 백만번 연습했었는데, 한번 정착하고 나서 괜찮았다. 그는 The Loft에서 함께 플레이할 누군가를 원했고, 보스턴의 여러 DJ를 찾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 나는 정말로 The Loft에서 연주할 수 있을것 같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때 어렸고 막 시작한 상태였다. 처음으로 거기서 플레이했을 때 나는 18살 어린 나이였다. Bruno, 이 빌어먹을놈, 그가 나를 금요일 밤에 불렀고 그것은 금요일 밤의 일상이었다. 나는 준비 중이었고, 나의 여동생도 그날 밤에 클럽으로 나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9시에 나에게 전화를 걸어와서 "오늘 밤 몇개의 레코드를 가져와 봐"라고 했다.
DJ Bruno : 그는 음악에 정말 열정적이었기 때문에 어느날 갑자기 "음, 플레이할 준비 되어 있어?"라고 물었더니 "뭐? 플레이할 준비 되어있냐고?" 라고 했다. 그가 처음 플레이한 날이었다. 나는 그가 몇번의 파티에서 플레이한 것을 보았고, 그는 Boston Beat와 Dance Music Plus에도 레코드를 사러 왔다. 나는 항상 그 친구가 음악에 열정적이라는 것을 주목하고 있었고, "알아? 나는 이 친구에게 기회를 줘봐야 겠다"라고 생각했다.
Francis Englehardt : Bruno가 말했다. "응, 잠시 플레이해봐." 진자 놀라게 하네. 내게 압박감을 주는 얘기 였다. 몇시간 전이었고, 이곳은 나에게 세상을 뜻하는 곳이었다. 나는 레코드를 정리해야 했고, 정말 당황스러웠다. 도착해서 부스에 들어가 Bruno에게 "모니터는 어디에요?"라고 물었다.
Nick Balodimas : Bruno는 놀라운 사람이었다. 그곳에는 모니터가 없었다. 스피커는 부스 양쪽에 있었는데, 이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당신은 레코드를 알아야 했다. 나는 가끔 그곳에서 게스트를 볼때 악몽이었다. Bruno는 일을 정말 잘했다. 그는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었고, 그가 그렇게 했다. 그래서 그가 사람들을 울리게 만들었다. 레코드를 두번 이상 플레이하기도 했는데, 두번재로 플레이할 때가 더 좋아보였다. 다른 곳에서는 허용되지 않을 어려운 음악도 플레이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ZLl5i7zmOA
Francis Englehardt : The Loft를 생각나게 하는 레코드 중 하나는 Jazzy의 Lonely (Cajmere's Underground Goodie Mix)이다. 그것을 들었을 때, 우주선이 내 머리 위에 착륙한 것 같았다. 그것에 움직일 수 밖에 없었고, 기본적인 날 것의 아날로그 신스 사운드와 그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Liza Zayas : The Loft를 생각나게 하는 특별한 트랙중 하나는 Joi Cardwell의 Trouble이다. Bruno가 그것을 테이프에 넣고 그것을 시작했는데, 이것은 어떤 의미로는 이 지구의 사람들에게 전하는 노래인데, 서로 챙겨야 한다는 메시지이다.
Francis Englehardt : 나는 밤이 끝날 때 소유자들과 이야기 한 기억이 있다. 그들은 금요일마다 800에서 900명의 사람들을 받았다. 이건 완전히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어느방도 200명이상의 사람을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처음 층에 사무실을 가지고 있었고, 나는 어느날 밤에 거기에 있었는데, 전체 층을 보고 있었다. 사람들이 위아래로 움직일때 빔이 구부러졌던 것을 기억한다. The Loft의 마지막 파티에서, Bruno는 Louie Vega를 초대했고, 나는 그 앞에서 플레이 했다. 그 파티는 정말로 많은 면에서 미친 파티였다. 그것은 감정적으로 너무 강렬했다. 우리 모두가 그것이 The Loft의 마지막 밤이 될 수 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Liza Zayas : The Loft가 닫힌 후에는 다른 곳에 가기 정말 힘들었다. The Loft에 다녀온 후에는 실제로 다른 곳이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Boston이나 내가 알고 있던 다른 곳의 클럽이 밤새 하우스를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에게 개인적으로 "나는 이제 어디서 일곱시간동안춤을 출까? 어디에서 음악을 배워야 할까?" 였다. 나는 하우스를 발견하고 17살때 The Loft에 가기 시작했다. 내가 들어가자마자, 나는 이미 그 교회의 헌신자였다. 나는 더 일찍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DJ Bruno : The Loft가 닫은 후에 나는 내 자신의 레코드 스토어, Biscuithead Records를 열었다. 나는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었지만 The Loft에 자주 다녀오던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그 분위기를 그리워했다. 첫번째 Loft 재결합은 1996년에 있었고, 그 이후로 나는 매년 M80에서 한번씩 열었다. 그곳은 나의 시작인 곳이다. 나 자신과 지역 DJ들이 플레이하는 파티였다. 모두가 30분짜리 셋을 가졌다. Fran도 그날 플레이 했고, Kevin James와 Paul Nickerson도 플레이했고, 꽤 많은 사람들이 플레이했다. 정말 좋은 파티였고, 그 순간부터 "젠장, 매년 한번씩 하자"고 생각했다.
Liza Zayas : 나는 매년 The Loft 재결합에 참석하기 시작했고, 대부분의 파티에 참석했다. The Loft 재결합은 지금은 어머니나 아버지가 된 사람, 국경을 넘어 이사간 사람, 더 이상 외출하지 않는 사람들을 끌어내는 희귀한 이벤트 중 하나이다. 그것은 청소년 시절을 다시 살아보는 것이 아니라 춤, 음악, 자유를 댚하는 당신의 일부를 완전히 재충전하는 것이다.
Francis Englehardt : 나는 DJ로 일하는 날이 아닌 날에도 The Loft에 여전히 갔었고, 줄을 서서 입장료를 지불했다. 나는 사람들을 게스트 리스트에 올리려고 하거나 심지어 무료로 들어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었고, 도어맨은 "뭐 하는 거야?"라고 물었다.
DJ Bruno : The Loft는 많은 사람들에게 놀라운 경험이었고, 나에게도 확실히 그랬다. 그것은 항상 옳은 장소에 옳은 시간에 있는 경험이었고, 나는 항상 그것에 감사하고 있다.
Francis Englehardt : 그것은 당신의 첫사랑처럼, 당신은 것을 잊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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