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읽다 한글로 정리하며 옮긴다. 원문은 아래 링크
https://daily.redbullmusicacademy.com/2016/11/tommy-musto-interview
이른시기 House, Techno, Rave 시대를 통틀어 가장 다작한 뉴욕 아티스트 중 하나와의 희귀 인터뷰
8,90년대의 Tommy Musto는 정말로 다재다능한 스튜디오와 레이블의 중심 인물이었다. 단 20년 동안 Musto는 WKTU의 전설적인 마스터믹스 DJ 중 한 명으로 활동했고 : 영향력 있는 하우스 레이블 Fourth Floor와 Sub-Urban을 공동창립하고 A&R을 담당했다. 그는 밈국의 DJ 중 최초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특히 언더그라운드 하우스 클래식을 다수 제작, 믹스, 프로그래밍, 엔지니어링 했다.
Northcott Productions의 프로덕션 및 A&R 책임자로서, 무스토는 크지않은 댄스 레이블 기업과 스튜디오를 뛰어난 재능과 레이블 기업가들을 위한 강력한 육성처로 승화시켰다. 그에게 Victor Simonelli, Johnny "D" De Mairo(Henry Street Music), Frankie Bones, Peter Daous등이 포함되었다. Musto의 지도 아래에서 Northcott은 뉴욕 가라지에 대한 필수적인 아울렛이 되었다.
그러나 하우스 음악 스타일이 더욱 다양화되고 점점 분리되면서, 또한 다운로드의 증가로 인해 물리적 레코드 비즈니스가 둔화되자, Musto는 Northcott의 운영을 유지하기 어려워졌으며 결국 그 문을 닫고 완전히 댄스 음악에서 떠나기로 결정했다. Musto의 놀랄만한 생상적인 경력의 흔적을 찾기 위해, Matthew Freundlich는 클럽 음악에 헌신된 20년 동안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그와 대면하여 앉아 인터뷰를 진행했다.
당신이 태어나고 자란곳에 대해 조금 이야기 해줄수 있나요? 브루클린 맞죠?
네, 브루클린이 맞아요. Gravesend, 브루클린에서 태어나 자랐어요. 음악에 어떻게 빠져들게 된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 해보겠다. 아머지가 텔레비전 수리기사였고, 내가 열살이 될즘에 좋은 스테레오, 헤드폰, 그리고 reel-to-reel 레코더를 사 주셨다. 음악적으로는 주변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는 대부분의 형제들이 Rock에 꽂혀 있었던 시기에, 저는 더 이상한 쪽에서 영향을 받았죠. 그리고 70년대에는 가장 나이많은 형제와 우리동네의 더 나이 많은 친구들이 Disco, R&B, James Brown, The Trammps와 같은 소울 음악을 듣기 시작했고, 점차 그 음악에 푹 빠졌다. 나는 DJ인 Double D Donald의 친척이었던 Donald DiFranco라는 사람과 어울리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일하던 분으로 우연히 Double D의 사촌이었다. Donald는 DJ 였다. 클럽이 아니라 집에서. 그가 집에가서 1100s와 믹서를 보여주면서 음악에 대한 열정을 전해주었다. 어린 시절에는 계속해서 45s 를 사다가 Donald가 가르쳐주기 시작하면서 12인치를 쌓아가기 시작했다. 아마도 76년 77년쯤이었던거 같다.
그 때, WBLS를 듣기 시작하고 나는 Ted Currier의 믹스쇼를 레코드하기 위해 내 reel-to-reel을 사용햇다. Ted는 매우 재능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의 전환은 길었고 블랜딩이 좋았다. "와 정말 멋지다. 이건 예술이야!"라고 생각했다. 이전에는 기타를 연주하고 싶어 했었는데, 부모님이 꽤 형편없는 기타를 사 주셨지만, 너무 복잡해서 손에 안맞았다. DJ가 음악과 좋은 관련이 있으며 정복하기가 더 쉬워 보였다.
그 당시에 믹서를 사서 DJ활동을 시작했고, 먼저 친구 Robert "Snake" Imbasciani와 그다음에는 Tommy Sozzi와 함께 모바일 파티와 Sweet 16s를 하면서 진행했다. Tommy Sozzi와 협업을 시작하면서 그것이 내 인생의 길이 되었고, 그 당시 나의 삶이기도 했다. 우리는 Ralphie Dee가 2001 오디세이에서 플레이하는 것처럼 다른 DJ들을 듣기 위해 클럽에 가기 시작했다. 그의 믹스를 집에서 시도하기 위해 적어둔 기억이 난다. 우리는 몇개의 클럽 기회를 얻게 되었고, Disco 64와 Bensonhurst, Brooklyn에 있는 Rainbow Teen disco같은 곳에서 플레이 했다. 양쪽다 오래 가지 않았지만, 그 지역에서 명성을 쌓기 시작했고, 고등학교 때 어느순간 Intermetro Record Pool에 참여하게 되었다.
Intermetro는 맨해튼의 스프링크 라파예트에 위치해 있었으며, 여러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 회원으로 참여했던 곳이었다. Sehp Pettibone, Junior Vasquez그리고 다른 여러 사람들이 그 풀에 속해있었을 거 같다. 풀의 디렉터인 Dewane Dixon은 Tommy와 나를 KTU의 프로그램 디렉터였던 Carlos de Jesus에게 소개해 주었다. 우리는 Carlos를 만나서 테이프 하나를 주었고, 그는 우리의 음악을 좋아하고 즐겨주었다. 브루클린에서 온 두 캐릭터라는 이유로[웃음] 그는 우리를 "The Dynamic Duo"로 명명하고 KTU에서 리믹스 팀 중 하나로 슬롯을 주었다. 다른 팀으로는 Jose "Animal" Diaz, Aldo Marin, Jellybean, Jim "chopper" Cone등이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우리를 알린것은 Carlos 덕분이었다. 그에게 정말 감사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SekurkyWOPI
어떻게 믹스를 레코드 했는지?
기본적으로 우리는 초기 믹스를 레코드로 만들고, 그 위에 4트랙과 2개의 reel-to-reel로 오버더빙했다. 그 당시에는 Shep Perribone에게 영향을 받았고, 그는 이미 그렇게 하고 있었다. 물론, Latin Rascals는 그 부분에 특화되어 있었다. 사실상 모두를 무너뜨렸다.[웃음] 그들은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다.
당시에는 스튜디오에서 활동하고 싶었는지?
네, 그 믹스를 만드는 기술적인 측면과 전통적인 믹싱을 넘어서는 것에 대한 도전은 제가 실제로 이루고 싶어했던 것이었다. 다른 것들을 할 지식이나 능력이 있다고 느꼈다.
그것이 당신이 리믹스를 시작한 방식이었나요?
우리의 믹스쇼 덕분에 이런 레이블들이 내게 전화를 걸어와서 "내 레코드를 플레이해줘"라고 말하면서, 그 기회를 "이 논래의 에디트를 만들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또는 "이 노래의 믹스를 해보고 싶어요"로 활용했다. 그렇게 시작되었다. Dewane이 나를 Vanguard의 프로모션 담당자인 Heidi Spiegel을 소개시켜 준 것으로 기억된다. 그녀는 Tommy와 나에게 첫번째 믹스 기회를 주었다. Junior Byron이 Barrabas의 Woman을 커버한 레코드의 믹스였다. 우리는 그 레코드를 23rd St에 위치한 Vanguard 스튜디오에서 믹스했는데, 거기서 Mark Berry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제 엔지니어이자 그 시대에 큰 영향을 끼친 프로듀서였다. Vanguard 일로부터 Tommy와 나는 Heidi Spiegel의 친구인 Eddie O'Laughlin을 위해 Next Plateau에서 "Doctor's Orders"의 믹스를 하게 되었고 이역시 Mark가 엔지니어링을 맡았다.
그런 트랙들을 믹스할 때, 당신은 프로듀서들과 긴밀하게 협업했나요? 아니면 그들이 단순히 테이프를 전해주고 당신이 자유롭게 작업하는 방식이었나요?
처음에는 프로듀서들이 매우 관여 했다. 그 시기에는 리믹서들이 누군가의 창작물을 신뢰할 수 있는 방식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중에는 "프로듀서를 여기서 쫒아내세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게 해주세요"가 되었죠.
몇년도 쯤인가요?
90년대 초중반이다.
그때쯤에는 당신이 Northcott Productions에서 일하기 시작한 시기였죠. 어떻게 이 기회가 생겼나요?
Intermetro가 문을 닫은 후, Tommy와 나는 브롱스에 위치한 S.U.R.E. (spinners Unlimited Record Enterprises) 레코드 풀로 갔다. 그곳에는 Aldo Marin, Tony Humphries 등이 있었다. 이곳은 Bobby Davis 가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는 Tommy와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던 은인이다. 그는 우리를 교육하고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해주었다.
Bobby는 25 West에서 B Beat Girls의 "For the Same Man"을 믹스했었고, 그 믹스를 통해 25 West와 그 계열사인 Northcott Productions의 소유자인 Silvio Tancredi와 친구가 되었다. Northcott는 몇개의 댄스 레이블을 운영하고 자체 음악 발매, 제작 및 유통도 처리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Y9pA8Ye3dg
나는 조금씩 Silvio와 어울리게 되었고, 그는 나를 유용한 존재로 보았던 것 같았다. (비꼬듯) 나는 그와 함께 일하면서 Tommy와 25 West를 위해 작업 하기 시작했다. 이때 나는 스튜디오를 배우기 시작한 시기였다. Silvio의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던 Matt Noble과 Kevin Calhoun은 Tommy와 나에게 처음으로 "Knights of the Turntables", "I Just Wanna Dance", "Tonight I'll Make You Mine" 같은 작품을 만드는 데 도움을 주었다. Matt는 프로그래머이자 키보드 플레이어로, 프로그래밍과 엔지니어링을 처음 가르쳐 준 사람이었다. Kevin은 내가 만난 사람 중에서 가장 웃긴 사람 중 한명이었지만, 그 후로 세상을 떠났다.
내가 더욱더 많이 참여하게 되자 Silvio는 나에게 동업을 제안하고 Fourth Floor를 시작했다.
Northcott 는 이미 몇개의 레이블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왜 또 다른 레이블을 시작하였나?
그것은 분리되어야 했다. 언더그라운드에서는 같은 레이블에서 다양한 장르를 시도하면 자기자신을 오염시킬 수 있었다. 그래서 Midnight Sun은 뉴욕과 플로리다에서 우리가 하는 프리스타일에 맞추어지고, Fourth Floor는 우리의 트래키한 시카고 하우스, 유럽 스타일에 맞추어진 것이었다. 또한 내 작업, 협업, 그리고 A&R을 위한 깨끗한 도화지를 가지고 싶었다. Fourth Floor의 첫 레코드는 Bam Boo 였는데, 그것은 나와 Lenny Dee의 협업이었다. 그 당시에 Tommy와 나는 Kingsbury Community College에 다니면서 그곳 라디오 스테이션에서 쇼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래서 당신은 커뮤니티 칼리지를 다니면서 Silvio를 위해 전일제로 일하고, KTU를 위해 믹스를 만들고, 대학 라디오 쇼를 진행하고 있었나?
네, 다만 그 시점에는 KTU 쇼가 이미 끝나 있었다. 왜냐하면 그 라디오 스테이션은 85년에 K-Rock으로 바뀌었다. Lenny가 우리 Kingsbury 쇼에 전화를 걸어 왔고, 우리는 그를 스튜디오로 초대해서 그와 얽히게 되었다. 그와 나는 "Bam Boo"를 만들었는데, 그것은 대마초를 피우는 것에 대한 농담이었다. 샘플링은 그당시 초기 단계에 있었다. 단순히 섹션을 배끼는 것 뿐이었고, 샘프을 뒤집어 다르게 들리게 만들려는 창의성은 전혀 없었다. 그 시기에는 그런 접근이 매우 흔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0PDfmcJ42HA
그해인 1987년에 Fourth Floor를 위해 두 획기적인 딥 하우스 레코드를 만들었는데, 첫 번째는 "The Morning After"였고, 이것은 Lenny와 함께 만들었습니다.
맞다. Lenny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는 제가 그랬던 것처럼 기술적으로 열려있는 편이 아니었다. 나는 그를 영감의 대상으로 사용했다. 나는 모든 키보드를 연주하고, 모든 프로그래밍을 했지만, 그에게서 오는 추가적인 영감이 있었다.
"The Morning After" 이후에 Arnold Jarvis의 "Take Some Time Out"을 Yvonne Turner와 함께 작곡하고 프로듀스 했는데, 프리스타일과 일렉트로 레코드에서 딥하우스로 전환하는 과정은 어떻게 이루어 졌나?
https://www.youtube.com/watch?v=Ck2H0bany1g
당시에는 프리스타일이 뉴욕에서 매우 주류였다. 그것은 내가 하고 있던 것 중 하나였지만, 나는 더욱 감각적이고 R&B에 중점을 둔 것이었다. Yvonne Turner에게서 내가 끌리는 것들을 보았고, 그것은 그 당시 나의 위치가 완전히 다르게 느껴졌다. 나는 그녀와 함께 작업을 시작했고, 정말로 흥미를 느꼈고, 그런 다음 그녀가 나를 Garage로 데려 갔는데, 그것은 86년이었던 것 같아요. "와, 정말 좋아!"라고 생각했죠. 그리고 결코 잊지 못할 순간들이었다. 그것은 추수감사절 밤이었고, 나는 너무 감동을 받았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분명히 나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Take Some Time Out"은 분명히 나는 완전히 다른 공간에 놓는데 도움이 되었고, 그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확실히 그것에 대해 Yvonne에게 감사하고 있다. 나 혼자서는 할 수 없었을 것이고, 그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다음 해인 1988년에는 Nu Groove와의 협업을 시작했는데, 그의 첫번째 레코드부터 시작되었다. 이것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Silvio는 Frank Mendez와 가장 친한 친구였는데, Frank는 Nu Groove를 시작하고 싶어했고, 이전에는 Silvio를 돕기 위해 그의 초기 시절을 지원했다. 그들은 우리의 스튜디오에서 사무실 공간을 빌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죽고 싶었다. 왜냐하면 내가 내 자신의 것을 엔지니어링하고 프로그래밍하고, Midnight Sun을 위해 엔지니어링하고 프로그래밍하고, Fourth Floor의 다른 아티스트들을 위해 엔지니어링하고 프로그래밍하고, Nu Groove 아티스트들을 위해 엔지니어링 하고 프로그래밍하고.. 나는 자살하고 싶었다.
당신은 분명 일을 힘들게 하고 있었다.
미친 시간이었다. Fourth Floor의 프로듀서들은 확장하고 싶어했고, Nu Groove는 또 다른 아울렛이었기 때문에, Silvio와 나는 모든 연결을 Frank Mendez에게 주었다. 그런 다음, 그들은 명성을 얻기 시작하고, 서서히 Burrell 형제와 같은 다른 사람들이 참여하기 시작했다. 나는 Burrell 형제들의 Nu Groove 세션에 항상 참여했다. 나는 Ronald 와 함께 레코드를 믹스했지만, 그들이 주도하는 프로듀서였고 나는 원하는 만큼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My Love Is Magic"을 듣고 그 때 만들었던 다른 것들을 들으면, 영향이 Burrell 형제들 쪽으로 향한다는 것이 명확해진다. 그러나 나의 작업은 구조, 사운드, 믹스의 배치 방식이었고, 물론 토론이 아니라 차이가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그것을 듣고 "이것을 훨씬 더 잘 할 수 있었을 텐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DJ일 때는 마디를 매우 주의깊게 듣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종종"나는 프로듀서이고 이 섹션이 여섯 마디로 끝나야 한다고 느낀다"라는 식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분명히 재능 있었고, 그만큼 멋진 사람들이었으며, 함게 있을 때 즐거웠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들과 연락을 하고 있다.
한편, 당신은 Musto & Bones를 진행하고 있었죠. 그것은 어디에 맞는 활동이었나?
Lenny가 나를 Frankie Bones에게 소개 했다. 그는 반항적이고, 미션을 가진 어린 나이었고, 그것이 내게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프로듀션을 시작했다. 나에게는 뒤돌아보면 "Take Some Time Out"이 나와 Frankie가 이미 크게 나뉜 시작이었다. 그 때 그는 "이 샘플을 가져다 쓰고, 그 샘플을 가져다 쓰고 싶어"하고, 그것들은 다른 노래의 뻔한 샘플이었다. 나는 그게 크리에이티브하지 않다고 생각했고, 그 당시에는 누군가의 음악을 가져다 쓰는 것을 별로 칭찬받고 싶지 않았다.
정말로 모든 것을 다른 방향으로 향하게 만든것은 1989년, 그와 나는 당시의 약혼자와 함게 유럽게 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우리가 어떤 일에 휘말리게 될지 심지어 상상할 수 없었다. 영국으로 가게 된 이유는 음악 라이선싱 측면에서 우리 음악을 다루던 Tim Taylor이 전체 투어를 예약해 줬기 때문이다. 우리는 Energy 레이브에서 많은 날을 받았다. 아침 4시에 들어가서 불빛을 보고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거야?" 하면서 드라이브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곳에 도착하면서 "이게 정말 미친 짓이다!" 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의 수와 그들이 DJ에게 준 위치... 무대는 마치 롤링 스톤즈를 위한 것 같았다!
Frankie는 항상 DJ였고, 그 당시에 나는 조금씩 DJing에서 벗어나 스튜디오 작업에 진정으로 집중하기 시작했다. 나의 망설임은 현재 새로운 레코드 중에 내가 많이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씬에 참여하고 있는 프로듀서로서 그 노래들을 듣고 있었지만, Frankie는 정말로 DJ 작업에 앞장서기 시작했고, 나는 거기 있었고 반은 내가 플레이 했다.
하지만 내 전 아내는 열이 나서 "네가 유럽에 가는거 싫어!"라고 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무대에 올라가 우리의 사인을 받으려는 여자들을 보고 "너는 가면 안돼, 너는 가면 안돼." 라고 했다. 나는 "너 미쳤어? 나는 평생을 기다리고 있었어!"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것이 나에게 "나는 그 길을 따르지 않을거야. 나는 더 많은 프로덕션 길을 따를 거야"라고 결정한 계기였다. 아마도 90년쯤이었을 것이다.
내가 한, 초기 메이저 레이블 리믹스들을 들어보면, 나는 내 레이브/테크노적인 것을 감성적인 하우스로 어떻게든 어울리게 만들려고 했는데, 그렇게 해서는 안됐던 것 같다.
그것이 당신이 주요 레이블 아티스트들을 위해 리믹스를 시작한 때였죠. 어떻게 이뤄졌나요?그것이 당신이 주요 레이블 아티스트들을 위해 리믹스를 시작한 때였죠. 어떻게 이뤄졌나요?
당시에 내가 한 것은, 게이 대표들과 많은 사람들과 친해지면서 Larry Flick이나 Epic Records를 이끄는 Frank Serallo와 같은 사람들을 알게 되었고, 그 덕에 Gloria Estefan 이나 Michael Jackson을 알게 되었다. 나의 매니저는 Duffy Macri로, 그는 Shep, Justin Strauss, Daniel Abraham도 매니저먼트 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나는 이 모든 주요 레이블 리믹스를 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나와 Frankie간의 완전한 이별이었다.
내가 했던 모든 초기 주요 레이블 리믹스를 들어보면, 대부분의 경우 내 레이브/테크노적인 것을 감성적인 하우스로 어떻게든 어울리게 만들려고 했는데, 그걸 하지 않았어야 했던 것 같다. 예를 들면 Thelma houston의 "Throw You Down"인데, 한쪽에는 완전한 테크노 믹스 - 또는 당시에는 우리가 테크노라고 생각한 것 - 이었고, 다른 쪽에는 좀 더 하우스나 R&B 믹스가 있었다. 그게 나에게 조금은 해를 입혔을 것 같다. 왜냐하면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것이 되려고 했기 때문이다. 나는 아마도 내가 얻어야 했던 다른 리믹스들을 얻지 못한 이유 중에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Kenny, Louie, David Morales와 같은 주유 레이블 리믹서들의 많은 성공은 - 이렇게 말하면 그들이 나를 싫어할지도 모르겠지만 - 이미 그들이 손을 대기 전에는 이미 훌륭한 보컬을 가진 레코드들에서 나왔다는 사실에서 나온 것 같다. 나는 많은 - 하나님이 나를 용서해 주시고 이 글을 읽을지도 모르는 이 아티스트들에게 미인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 B급 아티스트들을 많이 받아들이고 있었고, 나는 성장하고 싶었고, 물론 돈도 아주 좋았기 때문에 믹스를 했다. 그러나 그 중 많은 것이 나에게 약간의 상처를 주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레코드들은 결국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네, 그러나 너의 Olivia Newton-John의 덥 믹스와 같은 일부 리믹스 들은 Masters at Work이나 Morales의 것 만큼 잘 알려져 있지는 않더라도 훌륭한 트랙들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wcHlOoDcauo
믿어줘, 나는 그 레코드들이 자랑스럽고 다시 돌아갈 의사는 없어, 그러나 나는 정말로 그 분야에서 정말로 피어날 기회를 얻지 못한 것 같아, 왜냐하면 나에게는 히트한 아티스트들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야. 나는 그 리믹스들을 많이 들어봤고 그저 "음..."이었어. 그것들은 괜찮았고, 그것들은 인생을 바꾸지는 않았어. 그러나 그들은 있었고 나는 그것들을 만들 시간이 계약돼 있었어.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나보다 훨씬 더 오랜 기간동안 활동하고 더 유명한 사람들이 많아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아래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어. 그리고 그것은 정말로 연결과 매니지먼트에 달려 있어. 다른 사람들은 원래 창작 당시에 댄스 음악에 적합한 트랙들을 얻은 것이었어. 그것은 나에게 어려웠고 나는 그에 대해 정말로 쓰린 기분이었어, 말은 하지 않았지만 지금 말하고 있지.
동시에 그 리믹스를 하면 나는 내 노래 하우스 쪽을 확장하고 싶어했고, 그게 Sub-Urban을 시작한 시기였어.
Victor Simonelli를 어떻게 만났나?
나는 Lenny를 통해 Victor를 만났다. 그들은 나랑 몇 블록 떨어진 곳에서 살았지만 우리는 서로를 몰랐다. Lake Street 출신의 Victor.... 우리는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 - 내 자신, 그, Lenny, Frankie - 그리고 Fourth Floor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Victor와 나는 더 블랙, 소울풀한 것과 관련이 있었고 Fourth Floor에 보컬 레코드를 내놓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언더그라운드 하우스 이지만 보컬 중심의 레이블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진화였다.
Victor는 초기 Sub-Urban 레코드들에 많이 관여했다. 그는 나와 첫 번재 프로덕션을 했지만 그는 레이블을 시작하지 않았다. 그는 그 인터넷에서 그런 주장을 하지만 그것들은 사실이 아니다. 나는 그와 친구이고, 나는 그것을 반박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최종 결과는 최종 결과이다. 그런 다음 그는 유럽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것은 그의 레이블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길을 가게 되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RWEiiqNaYU
"Nothing Better."에 대해서 말해줘
그것은 나의 ORE와의 관계의 연장선 이었다. ORE는 Begga's Banquet과 관련이 있었고 [그들은 UK에서 Musto & Bones 앨범을 발매했다.], Begga's Banquet은 다른 레코드를 하려고 했고, 나는 그 시점에서 Frankie와 별로 관련이 없었기 때문에 Colourblind의 컨셉을 만들었다. 나는 "Nothing Better"를 Mike Rogers와 함께 공동 작업했다, 그는 내가 프로듀스한 많은 프리스타일 레코드 뿐만 아니라 첫번째 Deee-Lite 앨범과 다른 여러 대형 레코드들의 엔지니어였다. 우리는 노래를 구매하려고 많은 데모를 만들었다. 우리는 컨셉 앨범을 위해 뭔가 모으려고 했다.
너와 Victor는 함께 프로듀싱할때 각자 정해진 역할이 있었나?
Victor와 함게 한 모든 경우에 나는 모든 키보드를 연주하고 그의 어깨 위에서 드럼 프로그래밍을 모두 진행했다. 그는 내 옆에서 소리지르며 지켜보았다. 이는 Frankie, Lenny 모두에게 해당되었던 일이다. Victor는 Sub-Urban 레이블에서 나오지 않는다 해도 나를 이용했다. 그는 스튜디오 시간을 사고 내 시간에 대한 보상을 했다. 그는 정말 열정적이고 재능 있는 사람이었고, 분명 그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다 - 그 부분은 절대 빼앗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것들을 표현할 수 있는 아웃렛이 필요했고, 그 때 나는 그 공간에 있었던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nz0Fy0tEAV8
Fourth Floor를 부활시키고 "Sunday Shoutin'" 과 같은 레코드를 발매하게 결정한 계기가 무엇이었나?
전체 샘플링의 영향이 상당히 크고, 그 당시에는 미니멀한 트랙이 별다른 중요성을 갖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아마도 그 부흥이 있어서 우리는 레이블을 새롭게 재창조하려고 노력했다. 그 때 우리는 다른 레이블들의 유통도 시작했다. 처음에는 Henry Street이었고, 그 후에는 Soulfuric, Basement Boys, Yoruba등 많은 레이블들이 있었다. 우리는 꽤 많은 레이블을 제조 및 유통하고 있었다.
Fourth Floor와 같은 레이블에서 성공적인 판매를 한 레코드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보통 일반적인 레코드 - 사람들이 좋아하지만 크게 주목받지 않은 레코드 - 경우에는 3,000 - 5,000 정도 판매량이었다. 중간 규모의 레코드는 10,000 정도, 훌륭한 레코드는 20,000, 30,000, 40,000, 50,000... 그리고 그 시점에서 라이센스를 내야 하는 관심을 얻게 된다. 이게 작은 레이블의 현실이다.
음악이 그리웠고 음악을 떠나야 했던게 참으로 씁쓸 했다.
언제쯤 상황이 악화되기 시작했나?
2000년 경에 많은 변화가 시작된 것 같다. 음악 장르가 지나치게 세분화 되어서 여러 레코드를 출시하는 것이 가치가 없게 느껴졌다. 클럽에서는 특정 사운드만 재생되는데, 예를 들어 Sound Factory에 가면 Junior만 그의 사운드를 플레이했다. 그 당시에는 음악 산업 전체에 대해 매우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내 인생의 전부를 거기에 쏟아붓고 있는데, 여기서 계속 이어가고 싶은지 생각해다. 아무도 그것의 진가를 인정하지 않고, 판매량이 감소하고, 발매되는 레코드들은 내가 처음에 사인하거나 좋아할 레코드가 아니었다. 다운로드가 지배적으로 등장했고, DJ들은 이미 나에게 데모로 주어진 트랙을 플레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프로듀서가 자신의 트랙을 공유한다면, 그것을 발매하는 의미가 무엇인가?
더 작은 규모에서 한다면 계속할 수 있었을 것이지만, 소호에 사무실과 스튜디오, 7명의 직원, 매달 60,000달러의 비용이 드는 상황에서 판매량이 줄고 빚이 쌓이면서 정말로 심적으로 힘들었다. "왜 이렇게 하는거지? 내 미래를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있는데 결과가 나오지 않잖아?"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 동안 계속 되었던 상황에서 더 이상 만족감을 느끼지 못했고, 음악 비즈니스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점차 악화되었고, 9/11 사태가 발생하자 "이제 그만" 이라고 결심했다. 우리의 모든 장비와 카탈로그를 팔아버리고, 몇 가지만 남기고 모든 것을 정리 했다. 그리고 그것이 끝이 었다.
음악의 품위와 모든 것이 망가져 가는 느낌이었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없다면, 금융으로 가서 돈에 가까워질 것이다. 나는 돈에 탐욕스러운 사람이 되겠다!" 라고 생각했다. 어찌 되었든 그럴 수 없었다. [웃음] 그것도 잘 안 되었다. Morgan Stanley에서 일하게 되었다. 하루 종일 콘솔 앞에서 마리화나를 피우고 술을 마시며 밤을 새는 것에서 사무실 칸막이 앞에서 앉아 증권 시험을 보고 냉전전화를 거는 것으로 전환 되었다. 정말 지옥 같았다. 그리고 2002년에는 경기 침체가 일어났기 때문에 기름에 불을 붙인 셈이었다. 참으로 재앙이었다.
하지만 금융은 전혀 다른 세상이다. 어떻게 그 전환을 이루게 되었나?
나는 항상 숫자에 능통했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누군가와 빠르게 소통을 구축하고 재무 업무를 수행하는 데 재능과 기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당신이 나를 빠르게 신뢰하고 그것을 실현시키는 데에 관한 것이었다. 마치 나를 알지 못하는 프로듀서를 만나게 되면 그를 설득하여 함께 일하도록 해야 하는 것과 같았다. 그 측면에서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힘든 전환이었다. 나는 음악을 그리워하고 음악을 떠나야 했다는 점이 내게 쓰라린 일이었다. 몇 년 동안 나는 음악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삶을 살고 싶었다. 음악을 듣는 것이 힘들었고, 모든 것이 내가 가지고 있었던 것과 내가 했던 것을 기억하게 했다. 그러나 천천히지만 확실히 나는 다시 부드러워지기 시작했고, 디지털 음악을 다시 수집하고 친구들과 노래하며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 지 보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결국 다시 DJ에 흥미를 느끼고 컨트롤러를 사고, 지금은 디지털 음악을 많이 수집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지금 DJ에 대해 더 활발히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것은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아; 나는 눈을 감고도 할 수 있어, 그건 문제가 아니야. 그게 내 현재 위치죠. 지금은 모두가 어느정도 동일한 수준이고 더 이상 아무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제가 좋은 시기라고 생각해.[웃음] Louie Vega를 제외하고는 말이야!
By Matthew Freundlich on November 7,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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